라이트 형제와 글렌 커티스 특허 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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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2월, 라이트 형제는 1심 재판에서 승리했지만 항소로 이어지면서 소송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이트 형제는 소송에 집중하면서 정작 비행기 추가 개발에는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는데 1912년 사망한 윌버 라이트의 공백도 컸다. 이 시점에 유럽에서 개발된 비행기들의 성능이 Wright Company의 것보다 앞섰다.  
1913년 2월, 라이트 형제는 1심 재판에서 승리했지만 항소로 이어지면서 소송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이트 형제는 소송에 집중하면서 정작 비행기 추가 개발에는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는데 1912년 사망한 윌버 라이트의 공백도 컸다. 이 시점에 유럽에서 개발된 비행기들의 성능이 Wright Company의 것보다 앞섰다.  


1914년 1월, 항소 법원도 [[라이트 형제]]의 손을 들어 주었다.
1914년 1월, 항소 법원도 [[라이트 형제]]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사회는 라이트 형제가 기술을 도점해 글렌 커티스를 괴롭혔다며 라이트 형제를 탐욕스러운 존재로 몰았다. 이런 분위기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스미소니언 협회의 지속적인 흑색 선전이 원인이었다.


==특허 분쟁 후==
==특허 분쟁 후==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 형 윌버 라이트가 사망한 후 오빌 라이트는 법정 분쟁에서 승리했지만 비행기 개발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뒤였다. 그는 1916년 자신의 비행 특허권을 회사(Wright-Martin)에 1백만 달러에 매각했고 그는 직접적인 항공기 개발보다는 자문 등 지원 역할에 치중했다. 회사는 이후 다른 비행기 제작사 등을 상대로 로얄티 지급 분쟁을 지속하기도 했다. 회사는 1916년 12월 모든 비행기 제조사에 비행기 판매액의 5%를 로얄티로 요구했다.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 형 윌버 라이트가 1912년 사망한 후 오빌 라이트는 법정 분쟁에서 승리했지만 비행기 개발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뒤였다. 그는 1916년 자신의 비행 특허권을 회사(Wright-Martin)에 1백만 달러에 매각했고 그는 직접적인 항공기 개발보다는 자문 등 지원 역할에 치중했다. 회사는 이후 다른 비행기 제작사 등을 상대로 로얄티 지급 분쟁을 지속하기도 했다. 회사는 1916년 12월 모든 비행기 제조사에 비행기 판매액의 5%를 로얄티로 요구했다.


1929년, Wright-Martin과 Curtiss Aeroplane and Motor Company가 합병해 Curtiss-Wright라는 기업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29년, Wright-Martin과 Curtiss Aeroplane and Motor Company가 합병해 Curtiss-Wright라는 기업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