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형제와 글렌 커티스 특허 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31번째 줄: 31번째 줄:
[[라이트 형제]]가 [[글렌 커티스]]를 비롯한 비행기 제조사들을 상대로 벌인 특허 전쟁은 라이트 형제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돈에 눈이 어두워 무리한 특허권을 주장하고 특허료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런 과정에서 비행기 개발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유럽에 비행기 제작 기술이 뒤쳐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이유였다.
[[라이트 형제]]가 [[글렌 커티스]]를 비롯한 비행기 제조사들을 상대로 벌인 특허 전쟁은 라이트 형제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돈에 눈이 어두워 무리한 특허권을 주장하고 특허료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런 과정에서 비행기 개발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유럽에 비행기 제작 기술이 뒤쳐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특허라는 것이 개인의 재산권으로 인정한 것이었으므로 특허 분쟁의 1차적인 책임은 재산권을 무단으로 침해한 쪽에 있다고 봐야 한다.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하면서 발생한 부작용을 라이트 형제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글렌 커티스가 라이트 형제의 특허료를 무시한 것은 [[사무엘 랭글리]]를 포함한 스미소니언의 영향이 컸다. 라이트 형제보다 며칠 전 비행 실험에 나섰다가 실패한 저명한 과학자 [[사무엘 랭글리]]로서는 자전거 가게 주인에 불과한 라이트 형제의 성과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스미소니언 재단 측은 최초의 동력비행 성공 기록을 두고 1914년까지 라이트 형제와 계속해서 갈등을 벌였고 글렌 커티스 측도 라이트 형제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특허라는 것이 개인의 재산권으로 인정한 것이었으므로 특허 분쟁의 1차적인 책임은 재산권을 무단으로 침해한 쪽에 있다고 봐야 한다.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하면서 발생한 부작용을 라이트 형제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글렌 커티스가 라이트 형제의 특허료를 무시한 것은 [[사무엘 랭글리]]를 포함한 스미소니언의 영향이 컸다. 라이트 형제보다 며칠 전 비행 실험에 나섰다가 실패한 저명한 과학자 [[사무엘 랭글리]]로서는 자전거 가게 주인에 불과한 라이트 형제의 성과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스미소니언 재단 측은 [[최초의 동력 비행]] 성공 기록을 두고 1914년까지 라이트 형제와 계속해서 갈등을 벌였고 글렌 커티스 측도 라이트 형제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미소니언은 1942년이 되어서야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했다.)


만약 당시 라이트 형제의 특허권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라이센스 비용 지불 등 협력 체계를 갖췄다면 라이트 형제의 개발은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고 미국 항공기 산업 발전은 실제와는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만약 당시 라이트 형제의 특허권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라이센스 비용 지불 등 협력 체계를 갖췄다면 라이트 형제의 개발은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고 미국 항공기 산업 발전은 실제와는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