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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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편 비행 경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뉴욕을 출발해 김포공항으로 비행하던 대한항공 007편이 사할린 부근 상공에서 소련군에 의해 격추된 사건이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1983년 8월 31일 미국 뉴욕 JFK공항을 출발해 앵커리지공항을 경유, 김포공항으로 비행하던 대한항공 007편 여객기(B747-200)가 소련 사할린 부근 모네론 섬 상공에서 소련의 Su-15 전투기에 의해 격추 당해 추락했다. 탑승자 269명 전원 사망했다.

사고편 현황[편집 | 원본 편집]

  • 항공사/편명: 대한항공 007편 (B747-200, HL7442)
  • 발생 일시: 1983년 9월 1일
  • 사고 위치: 소비에트연방 사할린 인근 모네론 섬 상공
  • 출발지: JFK공항 (미국)
  • 경유지: 앵커리지공항 (미국)
  • 목적지: 서울 김포국제공항 (대한민국)
  • 탑승자/희생자: 269명 (승객 246명 / 승무원 23명) / 269명 (전원 사망)

세부 경위[편집 | 원본 편집]

사고기(HL7442)

8월 31일 JFK공항을 이륙해 당일 오후 8시 30분 경유지인 앵커리지공항에 착륙했다. 오후 10시에 이륙해 서울 김포공항으로 비행하던 중 9월 1일 0시 5분경 소련 캄차카 반도 북동쪽 상공에 진입했다. 이때 소련 방공군은 007편 항공기의 진입을 미국 공군 군용기라고 판단해 출격했지만 캄차카 상공에 체류한 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출격했던 소련 전투기는 귀환했다. 하지만 오전 2시 36분에 007편 여객기가 다시 소련 영토인 사할린 섬 상공에 접근했다.

오전 3시 5분, 007편은 뒤따라오던 LA발 대한항공 015편과 교신했고 항로가 서로 다른 것을 알았다. 015편은 정상적으로 소련 상공을 피해 비행 중이었지만 007편 기장은 오차 범위 안쪽이라고 판단, 항로를 벗어났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전 3시 8분 출격한 소련 Su-15 전투기가 007편 항공기를 확인했다. 어두웠기 때문에 기종 식별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꼬리 날개의 민항기 마크 등은 식별할 수 있었다고 알려졌다.) Su-15 전투기는 007편을 따라가면서 경고사격을 했지만 007편 항공기 조종사는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007편 여객기가 고도를 바꾸는(상승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적대적 행위라 판단한 Su-15 전투기 조종사는 007편이 민항기가 아닌 군용기라 여겼다. 민항기 마크는 위장용이고 전투기의 특성을 잘 아는 군용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얼마 있으면 소련 영공을 벗어나 공해로 빠져나갈 것을 그대로 두면 놓칠 것이라는 판단했고, 고도를 올린 007편 항공기가 속도를 내자 명백하게 자신들을 따돌리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오전 3시 25분 경 Su-15 전투기가 발사한 공대공 미사일 두 발 중 한 발이 007편 기체 후방에 근접 폭발했다. 기체 후방부에 구멍이 뚫리면서 최소 1개 이상의 유압장치가 파괴됐다. 약 11분 후에 여객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사고 원인[편집 | 원본 편집]

사고 발생 후 8년 가량이 지난 1991년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007편 항공기 블랙박스가 대한민국으로 전달됐다. 공정성을 위해 제 3국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항공당국에 제출해 분석했고 그 결과를 기반으로 ICAO 직권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다.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007편 격추 사건의 단초는 007편 조종사들의 과실이 제공했다. 이륙부터 격추 당할 때까지 항공기 항법INS 관성항법유도로 설정하지 않고 끝까지 나침방위 모드를 유지했다. 웨이포인트를 경유하면 날아가는 방식이 아닌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수단으로 비행했다는 것이다. 다만 기장(천병인)은 대통령 전용기 기장까지 맡았을 정도의 최고의 조종사로 평가 받았던 인물이기 때문에 조작 음모론까지 나왔다.

사고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사건 이후 미국은 개발 중인 GPS 위성 위치 정보 데이터를 (제한적 범위에서) 민간에게도 제공한다고 공표했다. 결국 INS에 GPS를 추가해 조합하는 방식으로 항공 항법 체계가 발전했다. 아울러 소련 해체와 함께 서방제 장비가 러시아 민항기에도 채용되기 시작했다.

미국 정치권은 이 사건을 외교적,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레이건 정부에 큰 이득을 안겨줬다.

0007편 희생자 유족들은 1993년 ICAO 최종보고서에서 밝혀진 조종사 과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서울지방법원에 대한항공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헤이그협약에 따라 손해배상채권 시효 2년이 지나 소송에서 패소했다. 이전에 대한항공과 유족간 합의(인당 10만 달러 보상)가 있었던 점이 패소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92년 LA연방법원에 제기한 소송에서는 11명 희생자 가족이 모두 2,100만 달러를 배상 받았다.

소련은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고 이 사건을 냉전시대에 조종 발생했던 격추사건 정도로 치부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이를 크게 다루기 시작했고 미국에 이어 일본이 감청한 소련군 교신 내용을 공개하자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일본은 냉전시대 정보전에서 도감청 능력과 기회를 크게 잃게 됐다.

소련은 마지막까지 007편이 민항기임을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소련 붕괴 이후 1996년에 민항기임을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1978년에도 이 사건과 유사한 격추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파리를 출발해 앵커리지 경유, 서울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902편 항공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됐다.

참고[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