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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형제와 글렌 커티스 특허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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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lying-maching-patent.jpg|200px|섬네일|라이트 형제의 Flying Machine 특허]]라이트 형제와 글렌 커티스 특허 분쟁 ==개요== 인류 최초의 동력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와 이 특허를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다수의 비행기 제조사를 상대로 라이센스 댓가를 지불하라며 벌인 법정 분쟁으로 가장 대표적인 상대가 [[글렌 커티스]]였다. 이 분쟁은 라이트 형제가 가진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받으려는 것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소요되면서 미국 항공산업 발전을 저해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실제 이 기간 중 유럽의 항공기 개발 기술은 급격히 발전했다.) ==특허 내용== [[라이트 형제]]가 수 많은 실험을 통해 고안한 항공기 움직임 원리에 대한 것([[3축 운동]])으로 1903년 [[3월 23일]] 'Flying Machine'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신청했다. 이 신청은 심사를 통해 1906년 [[5월 22일]] [https://patents.google.com/patent/US821393 US821393A] 특허로 인정받았다. ==전개== 1908년 라이트 형제는 글렌 커티스를 비롯한 초기 비행기 개발사에게 자신들의 특허를 침해하지 말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커티스는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1909년 뉴욕의 Aeronautic Society에 비행기를 판매했다. 이것이 특허를 둘러싼 길고 지루한 소송의 시작이었다. 1909년 9월 라이트 형제 제기한 특허 소송에는 [[글렌 커티스]]는 물론 관련된 다른 제조사나 [[비행사]]들도 소송에 포함하자 커티스를 비롯한 소송 상대자들은 '누군가 뛰어올라 두 팔을 흔들기만 하면 소송 대상이 될 것'이라며 라이트 형제를 조롱하기도 했다. 1913년 2월, 라이트 형제는 1심 재판에서 승리했지만 항소로 이어지면서 소송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이트 형제는 소송에 집중하면서 정작 비행기 추가 개발에는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는데 1912년 사망한 윌버 라이트의 공백도 컸다. 이 시점에 유럽에서 개발된 비행기들의 성능이 Wright Company의 것보다 앞섰다. 라이트 형제를 지지했던 옥타브 샤뉘트가 조국 프랑스에 동력 비행기를 알려 1908년 프랑스에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 제조 공장을 지었다. 프랑스에서 라이트 형제의 기술은 유출됐고 프랑스는 독자적인 비행기 제작에 들어가며 비행기 기술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1914년, [[글렌 커티스]]는 1903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 9일 전에 비록 실패했지만 [[사무엘 랭글리]]가 시도했던 비행에서 보여준 기술(조종 가능한 비행 특허 관련)이 먼저였다며 이를 증명하는 시험 비행을 실시했다. 글렌 커티스는 사무엘 랭글리의 당시 비행체를 복원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비평가들은 당시의 것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랭글리의 기술이 먼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1914년 1월, 항소 법원도 [[라이트 형제]]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사회는 라이트 형제가 기술을 독점해 글렌 커티스를 괴롭혔다며 라이트 형제를 탐욕스러운 존재로 몰았다. 이런 분위기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스미소니언 협회의 지속적인 흑색 선전이 원인이었다. ==특허 분쟁 후==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형 윌버 라이트가 1912년 사망했다. 오빌 라이트는 1914년 법정 분쟁에서 승리했지만 비행기 개발에 대한 열정은 사라진 뒤였다. 그는 1916년 자신의 비행 특허권을 회사(Wright-Martin)에 1백만 달러에 매각했고 그는 직접적인 항공기 개발보다는 자문 등 지원 역할에 치중했다. 회사는 이후 다른 비행기 제작사 등을 상대로 로얄티 지급 분쟁을 지속하기도 했다. 회사는 1916년 12월 모든 비행기 제조사에 비행기 판매액의 5%를 로얄티로 요구했다. 1929년, Wright-Martin과 [[Curtiss Aeroplane and Motor Company]]가 합병해 [[Curtiss-Wright]]라는 기업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타== [[라이트 형제]]가 [[글렌 커티스]]를 비롯한 비행기 제조사들을 상대로 벌인 특허 전쟁은 라이트 형제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돈에 눈이 어두워 무리한 특허권을 주장하고 특허료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런 과정에서 비행기 개발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사이에 유럽에 비행기 제작 기술이 뒤쳐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특허라는 것이 개인의 재산권으로 인정한 것이었으므로 특허 분쟁의 1차적인 책임은 재산권을 무단으로 침해한 쪽에 있다고 봐야 한다.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하면서 발생한 부작용을 라이트 형제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글렌 커티스가 라이트 형제의 특허료를 무시한 것은 [[사무엘 랭글리]]를 포함한 스미소니언의 영향이 컸다. 라이트 형제보다 며칠 전 비행 실험에 나섰다가 실패한 저명한 과학자 [[사무엘 랭글리]]로서는 자전거 가게 주인에 불과한 라이트 형제의 성과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스미소니언 재단 측은 [[최초의 동력 비행]] 성공 기록을 두고 1914년까지 라이트 형제와 계속해서 갈등을 벌였고 글렌 커티스 측도 라이트 형제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미소니언은 1942년이 되어서야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했다.) 만약 당시 라이트 형제의 특허권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라이센스 비용 지불 등 협력 체계를 갖췄다면 라이트 형제의 개발은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고 미국 항공기 산업 발전은 실제와는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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