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명령
사무엘 랭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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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비행기 개발자 | |
출생 | 1834년 8월 22일 |
사망 | 1906년 2월 27일 ( 7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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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랭글리(Samuel P. Langley) :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비행기 발명가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이다. 발명가로서 항공 부문에서 직접 비행기를 개발한 인물이었다.
스미소니언 협회 회장이었던 그는 미국 국방성의 지원에 힘입어 비행기 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동력비행 실험은 실패했고 결국 최초의 동력 비행 명예는 라이트 형제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사무엘 랭글리를 위시한 스미소니언은 라이트 형제의 최초의 동력비행 기록을 인정하지 않으며 지속적인 갈등을 벌였다.
동력비행 실험 실패[편집 | 원본 편집]
1903년 10월 7일 미국 워싱턴DC 인근에서 당시 스미소니언 협회 회장인 사무엘 랭글리의 비행실험이 이루어졌다. 미국 정부의 엄청난 거금 5만 달러와 스미소니언 협회에서 모은 2만 달러를 더해 개발한 비행기였다.
하지만 비행은 실패했다. 비행체가 발사대를 미끄러져 출발했지만 날아오르지 못하고 포토맥강으로 추락해 버렸다. 수 많은 언론과 관람객의 기대와는 다르게 강물에 고꾸라진 비행체와 익사 직전까지 간 조종사의 모습은 너무 처참했다.
두 달 뒤인 12월 8일 같은 장소에서 다시 비행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로 끝났다. 더 이상 언론은 랭글리의 편이 아니었다. '사람이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앞으로 10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며 비아냥거렸다. 랭글리 박사의 17년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비행에 대한 사무엘 랭글리와 라이트 형제 관점 차이[편집 | 원본 편집]
사무엘 랭글리의 동력비행 실패는 엔진에만 집중했던 것이 이유였다. 그는 하늘에 뜨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늘에 뜰 수 있는 엔진을 개발하면 하늘을 나는 것은 자연스럽게 가능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반면 라이트 형제는 하늘에서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바람에 그냥 떠다니는 글라이더가 아닌 조종(Control) 가능한 비행 방식에 집중한 것이다. 랭글리가 과학자로서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원리에만 집중해 실험과 시뮬레이션을 등한시한 반면 라이트 형제는 수 많은 실험과 비행을 거쳐 오류를 수정해가는 방식을 택했다.
라이트 형제와의 갈등[편집 | 원본 편집]
랭글리 박사의 비행실험 실패(12월 8일)로부터 불과 9일 후인 12월 17일 라이트 형제는 키티호크에서 인류 사상 첫 동력비행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단 12초 비행에 37미터 거리를 날았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59초 동안 260미터를 날아가는 동력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사무엘 랭글리를 위시한 스미소니언 협회는 과학자도 아닌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던 인물에 불과했던 라이트 형제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1904년 7월, 사무엘 랭글리와 라이트 형제의 대결이 벌어졌다. 두 동력 비행기가 2만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비행을 시작했지만 랭글리의 비행기는 힘없이 강물에 추락했다. 그러나 라이트 형제가 탄 비행기는 15분 동안이나 하늘을 날았다. 언론은 대서특필했고 랭글리는 패배에 좌절해 모든 활동을 멈추고 폐인처럼 지내다가 2년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
사무엘 랭글리, 라이트 형제 동력비행 거짓 주장[편집 | 원본 편집]
랭글리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지지자들이 주축이 된 스미소니언 협회는 라이트 형제가 랭글리의 아이디어 및 지식을 도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라이트 형제는 조사와 수사를 받아야 했다. 무죄로 판명됐지만 이후에도 스미소니언 협회는 라이트 형제가 도용한 것이라며 흑색 선전을 지속했고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는 팔리지 않았다. (미 육군은 여러 차례 시험 비행을 실시했지만 조건이 맞지 않는다며 구입하지 않았다.)
당시 세계 최고 과학자와 그가 회장으로 있는 저명한 스미소니언 협회에서 그의 기록과 기술을 인정하지 않았고, 라이트 형제와 경쟁하던 글렌 커티스의 1908년 비행을 최초의 동력비행 성공이라고 주장하며 갈등은 지속됐다.
여기에 글렌 커티스가 라이트 형제의 기술을 이용해 비행기를 제작하면서 특허 소송이 지속됐다. 미국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스미소니언 등의 영향으로 라이트 형제보다는 글렌 커티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쪽이었다. 1914년 미국 상급 법원에서 겨우 라이트 형제가 무고하다는 판결이 나왔지만 언론과 사회는 라이트 형제가 기술을 독점해 글렌 커티스를 괴롭혔다며 라이트 형제를 탐욕스러운 존재로 몰아 부칠 정도였다.
소송 등 분쟁과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개발에 발목[편집 | 원본 편집]
라이트 형제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 연구, 개발보다는 특허 분쟁 소송 등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고 더 많은 비행 과학 발전의 기회를 빼앗아 버렸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첫 동력비행에는 성공했지만 이후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고 결국 유럽의 비행기 기술 개발에 뒤처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갈등 해소[편집 | 원본 편집]
1942년 Fred C. Kelly가 발표한 라이트 형제 일대기를 통해 사실 관계가 알려졌고 스미소니언이 글렌 커티스의 비행 기록과 왜곡된 내용을 시인하면서 라이트 형제와의 갈등을 끝냈다. 라이트 형제는 스미소니언과의 갈등 때문에 사상 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했던 '플라이어 1호' 비행기를 미국이 아닌 영국 박물관에 (조건부) 기증했다. 스미소니언과의 갈등이 끝난 후 '플라이어 1호'는 1948년에서야 스미소니언 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참고[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