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항공 파산(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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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iiiio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월 18일 (월) 12:22 판

일본항공 파산 및 회생(2010년)

전후 공기업으로 출발해 한때 매출액 기준 세계 3위를 기록하기도 했던 일본항공이 민영화(1987년) 이후 23년 만인 2010년 파산보호(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이 구원투수로 나서 2011년 법정관리는 종료되었다.

파산 원인

일본항공 몰락은 민영화 후에도 정부의 특혜와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방만한 경영을 개선하지 못한 탓이다. 외국 분석가들은 일본항공에 대해 '좀비기업', '일본 경제의 축소판' 등의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경쟁력을 잃었지만 정부가 자금을 수혈해 연명하는 '좀비기업'들이 많고 일본항공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일본항공은 공기업이었던 습성을 버리지 목하고 관료들의 퇴직 후 이동하는 자리로 전락해 버렸다. 정부의 지방 경제 활성화나 국회의원 등의 공약 등을 이유로 적자 항공노선을 유지를 강제 당했고 일본항공은 이를 거부하지 못했다. 적자 노선이 증가해 일본항공 재무구조에 타격을 주었지만 이를 개선하지 못했다.

또한 자회사만 110여 개에 이르는 등 경영은 지나치게 방만했다. 이익을 내지 못하는 노선은 물론 간판만 있고 직원은 없는 유령부서가 수두룩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항공에 대해 2001년 이후 4차례나 공적자금지원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 호전은 커녀 부채는 더욱 늘어 총 채무가 8400억 엔을 넘어섰다.

흐름

  • 2010년 1월 19일, 도쿄지방법원에 파산보호 신청 (니시마츠 하루카 회장과 임원 사임)
  • 2010년 2월 1일, 교세라 회장인 이나모리 가즈오가 파산 일본항공 회생 책임자(회장)으로 취임
  • 2010년 2월 20일, 증권거래소에서 상장 폐지
  • 2010년 8월 31일, 도쿄지방법원에 회생계획 제출
  • 2011년 3월 28일, 법정관리 종료
  • 2012년 9월 19일, 도쿄 증권거래소 재상장

회생의 주역,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

2010년 1월, 일본 하토야마 총리의 요청을 받은 그는 일본항공 회장직을 수락했다. 연봉은 필요없다며 0엔으로 정했고, 교세라와 KDDI 회장인 만큼 일본항공에는 주 3-4일 정도 출근한다는 게 조건의 전부였다.

그가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임직원과의 개인면담이었다. 하루 종일 100명이 넘는 자회사 사장 등 임원들과 빠짐없이 1시간씩 면담했다. 현장을 방문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세부내역을 준비하지 않은 예산, 비용집행은 단칼에 거절했다. 자기 돈이라면 준비도 없이 지출하겠는가라며 주인의식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들은 사내 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3억 원 넘는 고연봉 조종사들은 40% 임금 삭감에 동의했다. 적자노선과 유령부서는 단숨에 정리해 버렸다.

그는 교세라의 아메바 경영 철학 담당자를 일본항공으로 데리고 가 자신의 철학을 일본항공에 전파하고 공유했다. 일본항공에게 경영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철학과 이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운명 공동체, 회계의식 향상, 팀플레이, 적극적 투쟁정신, 혁신 등을 강조하며 일본항공에 새로운 기업이념과 철학을 구축했다.

이런 노력과 새로운 기업문화은 일본항공의 극단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2009년 1337억 엔 적자였던 일본항공은 2010년 1884억 엔 흑자, 2011년에는 2049억 엔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후 그는 후임으로 조종사(우에키 요시하루), 정비사(아카사카 유우지) 출신을 선택해 회생 이후의 일본항공 조종간을 맡겼다. 대개 영업, 경영, 기획 전문가가 맡았던 리더 자리를 현장 중심의 전문가들에게 돌린 것이다. [1]

영향

공적자금 지원의 댓가로 일본항공에게는 신규 노선 취항 등 각종 투자에 제한이 가해졌고 이 조치는 2017년 3월까지 이어졌다.

전후 일본 항공업계의 최대 항공사 자리를 유지했던 일본항공은 파산보호 절차와 이후 영향으로 2015년을 기점으로 일본 1위 항공사 타이을은 전일공수에 넘겨 주었다.[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