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공항 역사
우리나라 비행장, 공항은 일제시대에 시작되었다. 그 목적은 일제의 대륙 진출의 근거지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민간 상용 항공교통 수요가 나타나면서 본격적인 공항 시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의도비행장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선 비행장은 1916년 건설된 여의도비행장이다. 일제는 경기도 용강면(현재 여의도)에 비행장 건설을 시작해 그해 9월에 활주로를 완성하고 10월 운영에 들어갔다. 일제는 표면상으로는 민간 항로 개설 등 항공교통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는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유사시 활용할 수 있는 비행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22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 비행을 실시했던 안창남이 여의도비행장에서 시험 비행을 하기도 했다. 여의도비행장은 한국전쟁 후 1953년 국제공항으로 승격했다. 1958년 1월에는 민간 공항 기능이 김포공항으로 이관되면서 공군기지로 역할을 담당했다가 1971년 2월 공군기지가 성남(현재 서울공항)으로 이전하면서 폐쇄되었다.
김포공항
김포공항은 일제 군부가 1939년 활주로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일제는 대륙진출의 근거지로 활용할 수 있는 두만강 인근 지역이 전략 요충지로 떠오르자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 김포비행장이다. 이외에도 일제는 해방 무렵까지 우리나라 전역에 40여 개 군 비행장을 건설했다.
1949년 한·미간 김포비행장 운영협정을 체결하면서 항공요원 양성과 시설 확충이 본격화되었다. 1957년 9월 10일 정부는 김포비행장을 국제공항으로 승격시키기로 하고 1958년 국제공항으로 승격했고, 1958년 1월 27일 여의도공항의 기능을 김포국제공항으로 이전하면서 김포공항 시대가 열렸다. 1958년 대한국민항공사가 운항을 시작했으며 1960년에는 공항 내 종합 터미널(구 국내선 터미널)을 건설하고 그해 관할권을 미군으로부터 넘겨받았다.
김포공항은 1958년 국제공항 승격이래 계속 성장하여 1971년 국내선 여객 처리 100만 명을 돌파했고, 국제선은 1973년 100만 명을 넘어섰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국제선 545만 명, 국내선 475만 명으로 1천만 명이 넘게 이용하는 공항으로 성장하였다.
국제공항 확장 계획에 따라 인천공항이 개항한 2001년 국제선 기능을 인천공항에 넘겨주고 국내선 전용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시내에 근접한 잇점 때문에 근거리 국제선 요구가 지속되자 2003년 김포(서울)-하네다(도쿄) 노선을 시작으로 국제선이 부활되었다. 2019년 현재 김포공항은 국내선 및 일본, 중국, 타이베이 등 근거리 국제노선 일부를 운항하는 국제공항으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김해공항
김해국제공항은 1940년 일본 육군비행장으로 개설된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출발했다. 해방 후 1946년 미군정이 C-47 항공기를 이용 김포비행장을 기점으로 서울-대구-부산 노선을 주 2회 운항하면서 수형비행장이 민간용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1948년 대한국민항공사가 서울-부산 노선을 개설해 운항하면서 여의도공항이 국제공항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수영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운영되었다.
1958년 수영비행장 이름이 부산비행장으로 변경되었고 1963년에는 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다. 1976년 8월, 부산비행장이 김해군 대저읍으로 이전하고 김해국제공항으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주공항
제주국제공항은 1942년 일본 육군비행장으로 시작하였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건설했던 활주로 등을 이용해 해방 후 1948년 민간 항공기가 운항을 시작했고 1958년 1월 정부는 정식 제주비행장으로 인가했다. 한일 항공협정이 체결되면서 1968년 4월 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다.
김포, 인천공항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가장 바쁜 공항이지만 활주로 1개(실제 2개지만 짧은 활주로 사용 어려움)로 포화상태가 되면서 2010년 들어서 제주 신공항 건설 논의가 시작되었다. 2015년 11월 제주 성산읍 일대에 제2공항 건설 계획을 발표한 이후 2019년 현재까지 논란이 가중되면서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