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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도코-오사카 구간 우편비행 대회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받는 등 탁월한 실력을 자랑했다. 동아일보의 초청으로 그해 12월 5일에 여의도 백사장에 도착해 10일,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넣은 [[금강호]]를 타고 모국 방문 비행을 실시해 일시에 유명인이 되었다. 당시 여의도 백사장에 비행을 보러 나온 사람은 5만 명에 달했다고 알려졌다. 이날 비행은 두 차례 시행해 각각 13분, 5분 동안 하늘을 날았다. 우리나라 상공에서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다.
1922년 도코-오사카 구간 우편비행 대회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받는 등 탁월한 실력을 자랑했다. 동아일보의 초청으로 그해 12월 5일에 여의도 백사장에 도착해 10일,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넣은 [[금강호]]를 타고 모국 방문 비행을 실시해 일시에 유명인이 되었다. 당시 여의도 백사장에 비행을 보러 나온 사람은 5만 명에 달했다고 알려졌다. 이날 비행은 두 차례 시행해 각각 13분, 5분 동안 하늘을 날았다. 우리나라 상공에서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다.


1924년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군 소속으로 근무했고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해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여운형의 주선으로 중국에서 비행학교 교장으로 [[비행사]]를 양성했다. 1930년 4월 2일 비행 중 엔진 결함으로 추락해 사망했다. 독립운동에 참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924년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군 소속으로 근무했고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해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여운형의 주선으로 중국에서 비행학교 교장으로 [[비행사]]를 양성했다. 1930년 4월 2일 비행 중 엔진 결함으로 추락해 29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달리했다. 독립운동에 참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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