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린드버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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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뉴욕 호텔 거부였던 레이몽 오티그(Raymond Orteig)는 대서양 횡단 비행 성공에 25,000달러 상금을 걸었다. 1926년 9월 21일 프랑스 비행사(René Fonck)가 시도(스콜스키 S-35 비행기로 뉴욕 루즈벨트 필드에서 [[이륙]])했지만 추락해 실패했다. 1927년 4월 26일 미군 해군 비행사가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5월 8일에는 프랑스 비행사가 도전했지만 비행 중 실종되고 말았다.
1919년 뉴욕 호텔 거부였던 레이몽 오티그(Raymond Orteig)는 대서양 횡단 비행 성공에 25,000달러 상금을 걸었다. 1926년 9월 21일 프랑스 비행사(René Fonck)가 시도(스콜스키 S-35 비행기로 뉴욕 루즈벨트 필드에서 [[이륙]])했지만 추락해 실패했다. 1927년 4월 26일 미군 해군 비행사가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5월 8일에는 프랑스 비행사가 도전했지만 비행 중 실종되고 말았다.


린드버그는 이 역사적인 비행 도전을 위해 어렵게 자금 18,000달러를 모아 소형 단발 비행기(Spirit of St. Louis)를 제작했다. 1927년 5월 20일 롱 아일랜드 루즈벨트 필드에서 이륙해 33시간을 비행한 끝에 다음날인 21일 오후 10시 22분 약 15만 명의 군중이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 파리 르부르제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하면서 단독 무착륙 비행에 성공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린드버그는 이 역사적인 비행 도전을 위해 어렵게 자금 18,000달러를 모아 소형 단발 비행기(Spirit of St. Louis)를 제작했다. 1927년 5월 20일 롱 아일랜드 루즈벨트 필드에서 이륙해 33시간 29분 비행한 끝에 다음날인 21일 오후 10시 22분 약 15만 명의 군중이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 파리 르부르제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하면서 단독 무착륙 비행에 성공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항속거리]] 능력을 위해 비행기 중량을 최대한 줄였다. 예비 [[조종사]], 낙하산 등의 조건을 생각하면 비행기가 커지고 소비되는 연료도 증가하기 때문에 횡단 비행이 어려워질 것이라 판단했다. 실제 조명탄이나 무전기, 낙하산 등을 탑재하지 않았고 먹을 것조차 충분히 싣지 않았다. 대신 최대한 연료를 많이 실었다. 이 탓에 실제 비행에서 이 연료통 탓에 시야를 가려 어렵게 비행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33시간 동안 누구도 교체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잠을 깨워가며 33시간 동안 비행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항속거리]] 능력을 위해 비행기 중량을 최대한 줄였다. 예비 [[조종사]], 낙하산 등의 조건을 생각하면 비행기가 커지고 소비되는 연료도 증가하기 때문에 횡단 비행이 어려워질 것이라 판단했다. 실제 조명탄이나 무전기, 낙하산 등을 탑재하지 않았고 먹을 것조차 충분히 싣지 않았다. 대신 최대한 연료를 많이 실었다. 이 탓에 실제 비행에서 이 연료통 탓에 시야를 가려 어렵게 비행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33시간 동안 누구도 교체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잠을 깨워가며 33시간 동안 비행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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