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형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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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소니언 분쟁 및 특허 갈등==
==스미소니언 분쟁 및 특허 갈등==


당시 저명한 과학자였던 사무엘 랭글리(Samuel P. Langley)도 비행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1903년까지 무동력 비행에 몇 차례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3년말 두 차례 시도한 비행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비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엔진으로 보았고 좀 더 향상된 엔진 개발에 몰두했다. 스미소니언 과학협회는 연구소장이었던 랭글리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글렌 커티스]]의 Aerodrome의 1914년 비행 성공을 최초의 동력비행이라며 라이트 형제의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비행기 개발자였던 [[글렌 커티스]]도 라이트 형제와 지리한 특허권 분쟁을 벌였다.
당시 저명한 과학자였던 사무엘 랭글리(Samuel P. Langley)도 비행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1903년까지 무동력 비행에 몇 차례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3년말 두 차례 시도한 동력 비행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비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엔진으로 보았고 좀 더 향상된 엔진 개발에 몰두했다. 스미소니언 과학협회는 연구소장이었던 랭글리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글렌 커티스]]의 Aerodrome의 1914년 비행 성공을 최초의 동력비행이라며 라이트 형제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행기 개발자였던 [[글렌 커티스]]도  
[[라이트 형제]]의 특허를 무단으로 사용해 라이트 형제와 지리한 특허권 분쟁을 벌였다.


[[라이트 형제]]의 특허에도 불구하고 [[글렌 커티스]]를 비롯한 비행기 제조사들이 라이트 형제의 특허를 무단으로 사용했다. 1909년 라이트 형제는 자신들의 특허를 무단으로 사용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스미소니언 과학협회와 랭글리 등의 영향력으로 미국의 여론은 글렌 커티스에 유리했다. 여러 차례 소송을 거쳐 법원에서 라이트 형제가 정당함을 증명했지만 여론은 라이트 형제의 탐욕으로 몰아부치는 분위기였다.
[[라이트 형제]]의 특허에도 불구하고 [[글렌 커티스]]를 비롯한 비행기 제조사들이 라이트 형제의 특허를 무단으로 사용했다. 1909년 라이트 형제는 자신들의 특허를 무단으로 사용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스미소니언 과학협회와 랭글리 등의 영향력으로 미국의 여론은 글렌 커티스에 유리했다. 여러 차례 소송을 거쳐 법원에서 라이트 형제가 정당함을 증명했지만 여론은 라이트 형제의 탐욕으로 몰아부치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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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오빌 라이트는 미국을 떠나 프랑스, 유럽 등에서 비행기 개발에 관여했다. 1928년 미국으로 돌아와 보니 글렌 커티스가 사업에 실패하며 부도에 빠졌다. 오빌 라이트는 글렌 커티스의 Curtiss를 1929년 인수해 Wright Company와 합병해 Curtiss-Wright가 된다. (사명에 커티스 이름이 먼저인 것을 두고 당시 미국에서는 커티스가 항공기 제조 시장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고 라이트 형제보다 이미지가 나았기 때문에 마케팅 상 커티스라는 이름을 앞세운 것으로 추정)
이에 오빌 라이트는 미국을 떠나 프랑스, 유럽 등에서 비행기 개발에 관여했다. 1928년 미국으로 돌아와 보니 글렌 커티스가 사업에 실패하며 부도에 빠졌다. 오빌 라이트는 글렌 커티스의 Curtiss를 1929년 인수해 Wright Company와 합병해 Curtiss-Wright가 된다. (사명에 커티스 이름이 먼저인 것을 두고 당시 미국에서는 커티스가 항공기 제조 시장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고 라이트 형제보다 이미지가 나았기 때문에 마케팅 상 커티스라는 이름을 앞세운 것으로 추정)


오빌 라이트는 끝내 자신의 조국 미국에 대해 섭섭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사상 최초의 동력비행이 이루어졌던 키티 호크(Kitty Hawk)에서 열린 1933년 30주년 기념식에 세운 기념비도 미국의 자금이 아닌 유럽 자금이었다. 1943년 40주년 기념식도 조촐하게 보냈다. 그는 인터뷰에서 미국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표했다.
오빌 라이트는 끝내 자신의 조국 미국에 대해 섭섭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사상 최초의 동력비행이 이루어졌던 키티 호크(Kitty Hawk)에서 열린 1933년 30주년 기념식에 세운 기념비도 미국의 자금이 아닌 유럽 자금이었고 1943년 40주년 기념식도 조촐하게 보냈다. 그는 인터뷰에서 미국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표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이나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 여러 곳에서는 나와 형 윌버에게 훈장과 표창장을 주고 명예 시민, 학자 등 명예를 주었지만 내 조국에서는 받아본 적이 없다"
  "영국, 프랑스, 독일이나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 여러 곳에서는 나와 형 윌버에게 훈장과 표창장을 주고 명예 시민, 학자 등 명예를 주었지만 내 조국에서는 받아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