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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라이트 형제는 글렌 커티스를 비롯한 초기 비행기 개발사에게 자신들의 특허를 침해하지 말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커티스는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1909년 뉴욕의 Aeronautic Society에 비행기를 판매했다. 이것이 특허를 둘러싼 길고 지루한 소송의 시작이었다. | 1908년 라이트 형제는 글렌 커티스를 비롯한 초기 비행기 개발사에게 자신들의 특허를 침해하지 말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커티스는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1909년 뉴욕의 Aeronautic Society에 비행기를 판매했다. 이것이 특허를 둘러싼 길고 지루한 소송의 시작이었다. | ||
라이트 | 1909년 9월 라이트 형제 제기한 특허 소송에는 [[글렌 커티스]]는 물론 관련된 다른 제조사나 비행사들도 소송에 포함하자 커티스를 비롯한 소송 상대자들은 '누군가 뛰어올라 두 팔을 흔들기만 하면 소송 대상이 될 것'이라며 라이트 형제를 조롱하기도 했다. | ||
1913년 2월, 라이트 형제는 1심 재판에서 승리했지만 항소로 이어지면서 소송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이트 형제는 소송에 집중하면서 정작 비행기 추가 개발에는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는데 1912년 사망한 윌버 라이트의 공백도 컸다. 이 시점에 유럽에서 개발된 비행기들의 성능이 Wright Company의 것보다 앞섰다. | |||
1913년 2월, 라이트 형제는 1심 재판에서 승리했지만 항소로 이어지면서 소송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이트 형제는 소송에 | |||
1914년 1월, 항소 법원도 [[라이트 형제]]의 손을 들어 주었다. | 1914년 1월, 항소 법원도 [[라이트 형제]]의 손을 들어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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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 분쟁 후== | ==특허 분쟁 후== | ||
형 윌버 라이트가 사망한 후 오빌 라이트는 1916년 자신의 비행 특허권을 회사(Wright-Martin)에 1백만 달러에 |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 형 윌버 라이트가 사망한 후 오빌 라이트는 법정 분쟁에서 승리했지만 비행기 개발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뒤였다. 그는 1916년 자신의 비행 특허권을 회사(Wright-Martin)에 1백만 달러에 매각했고 그는 직접적인 항공기 개발보다는 자문 등 지원 역할에 치중했다. 회사는 이후 다른 비행기 제작사 등을 상대로 로얄티 지급 분쟁을 지속하기도 했다. 회사는 1916년 12월 모든 비행기 제조사에 비행기 판매액의 5%를 로얄티로 요구했다. | ||
1929년, Wright-Martin과 Curtiss Aeroplane and Motor Company가 합병해 Curtiss-Wright라는 기업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1929년, Wright-Martin과 Curtiss Aeroplane and Motor Company가 합병해 Curtiss-Wright라는 기업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2020년 5월 24일 (일) 17:05 판
개요
인류 최초의 동력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와 이 특허를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다수의 비행기 제조사를 상대로 라이센스 댓가를 지불하라며 벌인 법정 분쟁으로 가장 대표적인 상대가 글렌 커티스였다. 이 분쟁은 라이트 형제가 가진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받으려는 것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소요되면서 미국 항공산업 발전을 저해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실제 이 기간 중 유럽의 항공기 개발 기술은 급격히 발전했다.)
특허 내용
라이트 형제가 1902년 실험을 통해 발명한 항공기 움직임 원리에 대한 것(3축 운동)으로 1903년 3월 23일 'Flying Machine'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신청했다. 이 신청은 심사를 통해 1906년 5월 22일 US821393A 특허로 인정받았다.
전개
1908년 라이트 형제는 글렌 커티스를 비롯한 초기 비행기 개발사에게 자신들의 특허를 침해하지 말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커티스는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1909년 뉴욕의 Aeronautic Society에 비행기를 판매했다. 이것이 특허를 둘러싼 길고 지루한 소송의 시작이었다.
1909년 9월 라이트 형제 제기한 특허 소송에는 글렌 커티스는 물론 관련된 다른 제조사나 비행사들도 소송에 포함하자 커티스를 비롯한 소송 상대자들은 '누군가 뛰어올라 두 팔을 흔들기만 하면 소송 대상이 될 것'이라며 라이트 형제를 조롱하기도 했다.
1913년 2월, 라이트 형제는 1심 재판에서 승리했지만 항소로 이어지면서 소송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이트 형제는 소송에 집중하면서 정작 비행기 추가 개발에는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는데 1912년 사망한 윌버 라이트의 공백도 컸다. 이 시점에 유럽에서 개발된 비행기들의 성능이 Wright Company의 것보다 앞섰다.
1914년 1월, 항소 법원도 라이트 형제의 손을 들어 주었다.
특허 분쟁 후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 형 윌버 라이트가 사망한 후 오빌 라이트는 법정 분쟁에서 승리했지만 비행기 개발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뒤였다. 그는 1916년 자신의 비행 특허권을 회사(Wright-Martin)에 1백만 달러에 매각했고 그는 직접적인 항공기 개발보다는 자문 등 지원 역할에 치중했다. 회사는 이후 다른 비행기 제작사 등을 상대로 로얄티 지급 분쟁을 지속하기도 했다. 회사는 1916년 12월 모든 비행기 제조사에 비행기 판매액의 5%를 로얄티로 요구했다.
1929년, Wright-Martin과 Curtiss Aeroplane and Motor Company가 합병해 Curtiss-Wright라는 기업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타
라이트 형제가 글렌 커티스를 비롯한 비행기 제조사들을 상대로 벌인 특허 전쟁은 라이트 형제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돈에 눈이 어두워 무리한 특허권을 주장하고 특허료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런 과정에서 비행기 개발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유럽에 비행기 제작 기술이 뒤쳐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당시에도 특허라는 것이 중요한 시기였고 1차적인 책임은 재산권을 무단으로 침해한 쪽에 있다고 봐야 한다.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하면서 발생한 부작용을 라이트 형제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당시 라이트 형제의 특허권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라이센스 비용 지불 등 협력 체계를 갖췄다면 라이트 형제의 개발은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고 미국 항공기 산업 발전은 실제와는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