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형제(Wright brothers)
형 윌버 라이트(1867/4/16~1912/5/30)과 동생 오빌 라이트(1871/8/19~1948/1/30)를 일컫는 표현으로 이들은 조종 가능한 동력 비행기를 개발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비행에 성공했으며, 하늘을 인류의 생활 범위로 만드는데 지대하게 공헌했다.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 제작 등을 통해 기본적인 기계 공항 기술을 익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비행의 기본 시작을 조종(Control)에 있다고 봤다. 그들이 개발한 3축 운동을 이용한 조종 방식은 비행기를 안정적이고 효과적으로 조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방식은 현재까지도 고정익 비행기의 기본 조종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의 비행기 개발자들이 강력한 엔진 등에 촛점을 맞춘 반면 라이트 형제는 조종 방식과 비행기 표면의 조종면 등 공기역학적 측면에 집중했다. 라이트 형제는 이를 위해 풍동을 직접 제작해 비행 원리와 공기역학을 직접 실험하며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며 공기보다 무거운 인공 물체가 하늘을 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풍동(윈드터널)은 비행기 개발 만큼이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생애
- 1868년 4월 16일, 윌버 라이트 출생
- 1871년 8월 19일, 오빌 라이트 출생
- 1892년, 당시 자전거 열풍을 보고 자전거 가게 오픈
- 1896년, 자신들만의 자전거 브랜드 생산 시작. 비행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토 릴리엔탈 추락 사망 사고로 비행에 대해 결정적으로 관심을 갖게 함
- 1899년, 오토 릴리엔탈,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연구 결과 등의 연구 시작
- 7월, 5피트 정도의 날개를 가진 연을 제작해 양력 변화 실험
- 1900년 10월 3일, 키티 호크에서 첫 글라이더(1900 글라이더) 비행 실험 실시
- 1901년, 기존 글라이더보다 날개 면적이 더 넓은 1901 글라이더 비행 실험
- 10월, 6피트 길이 풍동 개발해 날개 모형 실험 실시
- 1902년, 풍동 실험을 통해 확보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종면 일종인 러더를 장착한 '1902' 글라이더 제작
- 10월, 수백여 차례 비행 실시 (가장 긴 비행은 26초 동안 189.7미터) 실험을 통해 그들은 비행기 조종의 3축 운동 확인, 정립
- 1903년 3월 23일, '1902 글라이더' 실험을 통해 확보한 3축 운동을 근간으로 한 'Flying Machine' 특허권 획득
- 플라이어 1호(Wright Flyer 1) 제작 (자신들 가게에서 일하던 찰리 테일러가 프로펠러 엔진 제작)
- 12월 14일, 플라이어 1호 비행 실험 (윌버 라이트 탑승) 단 3초 비행
- 12월 17일, 플라이어 1호 2차 비행 실험 (오빌 라이트 탑승) 12초 동안 37미터 비행에 성공. 당일 두 번의 비행을 더 실시해 3미터 높이에서 53미터, 61미터 비행
- 1904년, 자전거 가게를 접고 비행기 개발에 전념하면서 특허 방어에 집중(이는 자신들의 발명품을 이용해 사업, 개발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 8월 13일, 플라이어 2호(Wright Flyer 2)로 400미터 비행
- 9월 20일, 1분 30초 동안 1244미터 비행. 회전 비행 성공
- 11월 9일, 5분 동안 3마일(4800미터) 비행. 4번의 회전 비행 성공
- 1905년, 9월 26~10월 5일
- 다수의 비행 실험에서 상당한 성공 결과. 17분~38분 비행시간에 11마일~24마일(39킬로미터) 비행
- 1905년~1907년,
-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 구매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는 비행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비행 자체에 의심을 품었고 미국 육군 뿐 아니라 유럽 등에서도 라이트 형제를 '거짓말쟁이'로 치부했다.
- 1908년 5월 14일, 조종사 외 승객(Charles Furnas)을 태우고 '1905 플라이어(Wright Flyer 3)' 29초간 600미터 비행 성공[1]
- 그러나 이날 마지막 비행에서 추락 사고가 발생해 오빌 라이트 부상. 비행기 파손
- 8월 8일, 프랑스 Le Mans에서 공개 비행. 1분 45초 동안 회전 비행 등을 선보이며 당시까지의 대중 불신을 불식. 이를 통해 라이트 형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 9월 3일, 미 육군 부대(Fort Myer)에서 오빌 라이트 비행 성공
- 9월 17일, Fort Myer에서 군인(Thomas Selfridge)을 태운 비행에서 추락사고가 발생해 군인은 사망했고 오빌 라이트는 중상을 입었다.
- 1909년 7월, 미 육군 요구사항(2인승, 평균 속도 40마일, 안전 착륙)을 충족시키는 비행에 성공하고 미 항공부대에 비행기를 3만 달러 판매
- 10월, 윌버 라이트는 뉴욕 축제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포함해 뉴욕 상공을 33분간 비행하며 명성 구축
- 11월 22일, Wright Company 설립
- 1910년 11월 17일, Wright Company 첫 상업 화물 운송 비행
- 1912년 5월 30일, 장티푸스로 윌버 라이트 사망
- 1915년, Wright Company 매각
- 사업에서 물러난 이후 더 이상 항공기 개발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항공산업에서 자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 1948년 1월 30일, 동생 오빌 라이트 76세 나이로 사망
스미소니언 분쟁
당시 저명한 과학자였던 사무엘 랭글리(Samuel P. Langley)도 비행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1903년까지 무동력 비행에 몇 차례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3년말 두 차례 시도한 비행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비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엔진으로 보았고 좀 더 향상된 엔진 개발에 몰두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연구소장이었던 랭글리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글렌 커티스의 Aerodrome의 1914년 비행 성공을 최초의 동력비행이라며 라이트 형제의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비행기 개발자였던 글렌 커티스도 라이트 형제와 지리한 특허권 분쟁을 벌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라이트 형제가 설립한 Wright Company와 글랜 커티스가 설립한 Curtiss는 1929년 합병해 Curtiss-Wright가 된다)
스미소니언과의 갈등으로 라이트 형제는 스미소니언에 기부하기로 했던 '플라이어 1호(Wright Flyer 1)'를 영국 대영박물관에 빌려주어 전시하도록 했다. 스미소니언과의 갈등은 1942년 Fred C. Kelly의 라이트 형제 전기에 대해 악화된 여론으로 인해 스미소니언이 1914년 비행 기록과 왜곡된 내용을 시인하면서 끝났다. 그리고 1948년 플라이어 1호는 영국에서 돌아와 스미소니언에 공식 전시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