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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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사, 항공 기업인, 정치인 | |
출생 | 1901년 10월 15일 |
사망 | 1961년 7월 16일 ( 5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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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욱(愼鏞頊)[1] : 일제 강점기 비행사, 기업인이자 정치인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그는 1922년 3월 25일 3등 비행기조종사 면허를 취득한 후 일본으로 유학해 1923년 일본 오구리비행학교, 1924년 도아비행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27년 2등 비행기 조종사 면허 취득, 1932년 12월 다치가와 육군비행학교를 수료해 1등 비행기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다.이후 미국 조종학교에서 헬리콥터 조종사 면허도 취득했다.
그는 귀국 후 1929년 조선비행학교를 창립해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조선의 청년들을 모집해 비행기술을 교육했다. 여기에서 교육을 받아 양성된 조종사는 대부분 일본군으로 보내졌고 1936년 조선항공공업사(신항공사업사) 설립해 운영했지만 물자 대부분 일제의 태평양전쟁에 징발되었다. 1942년 조선항공공업을 설립해 비행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1944년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일본 해군에 비행기를 제작, 납품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를 군수물자로 간주한 미군에 의해 폐기처분되었다.
해방 후 1946년, 대한국제항공사를 설립했으며 1948년 대한국민항공사(KNA)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 받았으나 그의 친일행위가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 받았다. 하지만 결국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는 자유당 소속으로 2,3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등 정치활동을 병행했다. 1958년 창랑호가 북한에 납치되면서 재정적 압박이 시작되었다. 그는 1961년 8월 26일 여의도비행장 부근 강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는데 경찰은 사업 실패를 비관한 자살로 결론 내렸다.
그의 죽음과 함께 1962년 도산을 눈앞에 두게 된 대한국민항공사는 정부가 흡수해 국영 항공사 대한항공공사로 전환했다.
그는 대한국민항공사 사장 시절 직접 항공기를 조종해 운항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항공 사업[편집 | 원본 편집]
- 1930년, 조선비행학교 설립
- 1936년, 조선항공공업사 설립
- 1942년, 조선항공공업 설립
- 1944년,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
- 1946년, 대한국제항공사 설립, 이후 대한국민항공사로 사명 변경하고 사장 취임
참고[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