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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항공 파산 및 회생(2010년)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전후 공기업으로 출발해 한때 매출액 기준 세계 3위를 기록하기도 했던 일본항공이 민영화(1987년) 이후 23년 만인 2010년 파산보호(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반관반민 체제로 수익성 낮은 공항을 운행하는 등 비효율성이 크게 증가했고 정부의 자금 수혈에 연명하는 좀비기업이 되며 결국 2010년 파산보호를 선택했다.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이 구원투수로 나서 2011년 법정관리 종료, 2012년 9월 증권거래소에 재상장되며 완전 정상화되었다.


흐름[편집 | 원본 편집]

  • 2010년 1월 19일, 도쿄지방법원에 파산보호 신청 (니시마츠 하루카 회장과 임원 사임)[1][2]
  • 2010년 2월 1일, 교세라 회장인 이나모리 가즈오가 파산 일본항공 회생 책임자(회장)으로 취임
  • 2010년 2월 20일, 증권거래소에서 상장 폐지
  • 2010년 8월 31일, 도쿄지방법원에 회생계획 제출
  • 2011년 3월 28일, 법정관리 종료
  • 2012년 9월 19일, 도쿄 증권거래소 재상장
  • 2017년 3월 31일, 공적자금 지원과 관련된 일본항공에 대한 (신규 노선 취항, 투자 등) 제재 종료

파산 원인[편집 | 원본 편집]

1951년 설립 이후 일본항공은 줄곧 반관반민 체제를 이어왔다. 1987년 민영화 이후에도 전직 관료들이 낙하산으로 일본항공 경영층을 차지했고 일본 정치권은 지방 민심을 얻기 위해 수익성 낮은 지방공항에도 일본항공을 운항시켰다. 2002년 재팬에어시스템을 인수한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덩치는 커졌지만 중복 노선만 늘어나면서 비효율성은 크게 증가했다.

일본항공 몰락은 민영화(1987년) 후에도 정부의 특혜와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방만한 경영을 개선하지 못한 탓이다. 외국 분석가들은 일본항공에 대해 '좀비기업', '일본 경제의 축소판' 등의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경쟁력을 잃었지만 정부가 자금을 수혈해 연명하는 '좀비기업'들이 많고 일본항공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일본항공은 공기업이었던 습성을 버리지 목하고 관료들의 퇴직 후 이동하는 자리로 전락해 버렸다. 정부의 지방 경제 활성화나 국회의원 등의 공약 등을 이유로 적자 항공노선을 유지를 강제 당했고 일본항공은 이를 거부하지 못했다. 적자 노선이 증가해 일본항공 재무구조에 타격을 주었지만 이를 개선하지 못했다.

또한 자회사만 110여 개에 이르는 등 경영은 지나치게 방만했다. 이익을 내지 못하는 노선은 물론 간판만 있고 직원은 없는 유령부서가 수두룩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항공에 대해 2001년 이후 4차례나 공적자금지원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 호전은 커녕 부채는 더욱 늘어 총 채무가 8400억 엔을 넘어섰다.

회생의 주역,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편집 | 원본 편집]

2010년 파산보호를 신청한 후 일본항공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은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이었다. 2010년 1월, 일본 하토야마 총리의 요청을 받은 78세의 老경영인 이나모리 가즈오는 몇 차례 고사 끝에 일본항공 회장직을 수락했다. 연봉은 필요없다며 0엔으로 정했고, 교세라와 KDDI 회장이었기 때문에 일본항공에는 주 3-4일 정도 출근한다는 게 조건의 전부였다.

그가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임직원과의 개인면담이었다. 하루 종일 100명이 넘는 자회사 사장 등 임원들과 빠짐없이 1시간씩 면담했다. 관료주의가 체질화된 일본항공 경영진에게 비전이 없다고 판단했다. 관료주의를 없애고 임직원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 가치관, 판단 기준을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이나모리 회장은 '효율성'을 앞세워 JAL 운영 전략을 재정비했다. 작은 조직에 큰 의사 결정권을 부여한 아메바 경영 방식을 도입했다. 일본 정부는 6조 원에 달하는 금융채무를 탕감해주는 등 13조 원에 달하는 금융을 지원했다. 또한 정부 차원에서 리스사나 정유사 등에 신용보증을 서면서 일본항공은 큰 무리없이 법정관리에서 벗어났다. 2012년 주식시장에 재상장되면서 정상화되었다.

의식 개혁[편집 | 원본 편집]

취임 직후 2010년 6월에는 업무 후 간부 50-60명을 모아 17회에 걸쳐 '인간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리더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해 토론하며 자신의 50년 경영철학을 전했다.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다'와 같은 원칙적인 내용이었고 반복 교육을 통해 이해시키고 의식개혁을 이끌었다. 도덕 교과서 같은 이야기였지만 알면서도 행하지 않았던 일본항공 경영진과 기업 문화에 변화를 주고자 했다.

어린 아이들에게나 할 법한 설교를 듣는 일본항공 임직원들의 자세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열정적인 그의 설득과 주장은 간부들의 의식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고 그의 경영철학은 회사 전체로 퍼져나갔다. '교세라 필로소피(철학)'을 벤치마킹해 'JAL 필로소피'를 만들었다. '인간으로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판단해야 한다, 조그마한 노력을 지속한다, 본심으로 대한다, 성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진정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 등의 원론적이고 누구나 알 만한 것이었지만 기본을 잃어버렸던 회사의 기본 가치를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기업이념을 만들었다. 교세라와 마찬가지로 '물심양면으로 전 사원의 행복을 추구한다'였다. 회사가 사원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면 사원은 자신의 회사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고, 좋은 실적을 통해 주주가치가 상승한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아메바 경영[편집 | 원본 편집]

그는 교세라의 아메바 경영 철학 담당자를 일본항공으로 데리고 와 자신의 철학을 일본항공에 전파하고 공유했다. 일본항공에게 경영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철학과 이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운명 공동체, 회계의식 향상, 팀플레이, 적극적 투쟁정신, 혁신 등을 강조하며 일본항공에 새로운 기업이념과 철학을 구축했다.

공기업 분위기가 팽배했던 일본항공에는 수치와 재무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예산과 비용은 한 번 세우면 그대로 집행하는 것이고 운항계획은 이익 여부와 관계없이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교세라 스타일의 업적보고회를 만들고 회계 의식을 강화했다. 수치의 중요성을 임직원에게 이해시켰고 아메바 경영읨 근간인 '소집단 부문별 채산관리'를 도입했다.

아메바 경영은 회사 조직을 작은 팀으로 나누고 팀별 수익성을 산출해 이를 바탕으로 효율성을 최대로 끌어 올리는 경영기법이다. 부서나 팀 단위 손익이 1개월 단위로 산출된다. 모든 사원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하고 경영 의식을 가진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세부내역을 준비하지 않은 예산, 비용집행은 단칼에 거절했다. 자기 돈이라면 준비도 없이 지출하겠는가라며 주인의식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들은 사내 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3억 원 넘는 고연봉 조종사들은 40% 임금 삭감에 동의했다. 적자노선과 유령부서는 단숨에 정리해 버렸다.

성과[편집 | 원본 편집]

이런 노력과 새로운 기업문화는 일본항공의 극단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2009년 1337억 엔 적자였던 일본항공은 2010년 1884억 엔 흑자, 2011년에는 2049억 엔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성공적인 회생과 더불어 2012년 도쿄 증권거래소에 재상장되며 성공적인 기업회생의 모델이 되었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이후 2012년 조종사 출신 우에키 요시하루(植木義晴)를 대표이사로 선임해 일본항공 조종간을 맡겼고, 2018년에는 정비사 출신 아카사카 유우지(赤坂祐二)가 그 뒤를 이어 받았다. 대개 영업, 경영, 기획 전문가가 맡았던 리더 자리를 현장 중심의 전문가들에게 돌린 것이다. [3]

이후 2024년에도 후임 대표이사 사장에 객실승무원 출신 돗토리 미츠코(鳥取 三津子)가 선임되었다.

영향[편집 | 원본 편집]

공적자금 지원의 댓가로 일본항공에게는 신규 노선 취항 등 각종 투자에 제한이 가해졌고 이 조치는 2017년 3월까지 이어졌다.[4]

전후 일본 항공업계의 최대 항공사 자리를 유지했던 일본항공은 파산보호 절차와 이후 영향으로 2015년을 기점으로 일본 1위 항공사 타이틀은 전일공수에 넘겨 주었다.[5]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