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다.
그날도 파리공항으로 도착하는 비행기가 늦었다. 중국을 통과하는 항로가 복잡해 붐비기 때문이었다.
비행기 한 시간 늦게 도착하는 거 별 거 아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피 말리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파리 같은 대도시는 항공교통도 발달해 여러 도시를 잇는 교통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파리공항에서 다른 항공편으로 갈아타는 이른 바 환승(트랜짓, Transit) 승객이 꽤 많다.
그런데 항공기가 늦게 도착하면 다음 편 항공기로 갈아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항공기가 연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환승 승객이 얼마나 되나 살펴보니 약 40명 단체의 다음 항공편 연결시간이 짧아 보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다음 편으로 갈아타지 못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여긴 복잡하기로 악명높은 파리공항 아닌가?
항공기에서 바로 단체승객을 버스로 갈아태워 다음 편 항공기가 있는 곳으로 머리카락 휘날리게 달려갔다. 하지만 큰일났다. 이 어처구니 없는 항공기가 이 단체 승객들을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렸던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 단체 대부분은 학생들이다. 잼보리 행사 참가차 코펜하겐으로 가던 12-15세 정도의 어린 스카우트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정말 큰일이다.
다음 출발 항공편에 자리를 살펴보니 기껏해야 4-5석 정도 밖에 여유가 없다. 더군다나 어린 학생들이라 나누어서 비행기에 태울 수도 없다. 어쩔 수 없다. 40명 단체를 한번에 항공편에 탑승시켜야 한다.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항공편을 확보할 수 없다. 우선 이 학생들에게 숙소를 마련해 잠을 자게 해야 한다. 호텔을 수소문해 방을 확보하고 이동해 우선 휴식을 취하게 했다.
수소문 끝에 겨우 확보한 항공편 스케줄을 들고 단체 인솔자에게 설명했다. 이 분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 일련의 사태를 분노와 삭힘으로 대체 일정을 받아들이고 마무리 해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사실 항공기 지연, 특히 항공교통 트래픽 문제 때문에 발생한 지연은 항공사 귀책이 아니다. 하지만 이용하는 승객 입장에선 항공사를 믿고 선택했다는 점에서 일정부분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부리나케 다녀 온 암스텔담 공항
어쨌거나 다음 날로 지연되기는 했지만 원래 목적지로 40명 단체가 한번에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 안도했다. 비록 암스텔담을 거쳐가야 하는 다소 고단한 일정이었지만 말이다.
새벽 3시,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움직이려면 말이다. 다른 직원을 통해 아침 일찍 그 단체가 파리 출발 에어프랑스 항공편에 무사히 탑승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선잠을 깼지만 비몽사몽 간에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또 다른, 아니 그 상황의 연장 사건이 다시 발생했다.
공항 사무실에 출근해 보니, 에어프랑스로부터 연락이 왔다. 공항 탑승구 근처에서 여권을 습득했다는 것이다. 한국 여권이란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설마.. 아침에 출발했던 그 단체의 여권은 아니겠지?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고 했던가?
파리공항에 남아있던 여권이 그 단체 학생들 것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항공편에 탑승을 했다는 것은 여권과 탑승권을 보여줬다는 걸 의미하기에 항공기에 탑승하기 직전 떨어뜨리고 항공기에 탑승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미 그 단체 학생들은 암스텔담에 가 있고, 그 중 한 학생은 여권이 없는 상태이고.. 이런 상태에서는 그 다음 목적지인 코펜하겐으로는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린 학생 혼자 낯선 공항에 남기고 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암스텔담의 우리 지점이 그 단체들의 식사나 여러가지 일정을 봐 주고 있었지만, 여권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결정은 습득한 여권을 들고 암스텔담으로 직접 날아가는 것이었다. 암스텔담행 항공편 출발이 한 시간도 채 남지않은 상태에서 티켓을 발권하고 해당 터미널로 뛰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이 비행기 탈 수 없다. 못 타면 여권 전달 못하고, 암스텔담 그 학생은 코펜하겐으로 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
마음이 급했다. 그래도 서두른 덕분에 암스텔담행 항공기에 무사히 탑승했다. 이제 이 비행기가 암스텔담에 제대로 도착하면 어떻게 하든 그 학생 단체의 코펜하겐 비행편이 출발하기 전에 여권을 전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이건 뭔가?
기내 안내 방송으로 들려오는 기장의 목소리는 나를 경악하게, 그리고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정비 마무리 작업 관계로 조금(Slightly) 지연 되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냐고? 이 비행기라도 제대로 출발해 줘야 암스텔담 공항에서 여권을 학생에게 전달할 수 있을텐데, 모든 상황이 최악이다. 상황이 점점 나를 절망 속으로 빠지게 했다.
그래! 조금 늦더라도 원래 항공편 스케줄에 약간의 여유는 있으니, 정시에 도착할 지 몰라! 어쩌면 여권을 전달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한 10분 지나자 항공기가 서서히 움직인다. 다행이다. 움직인다. 이 정도면 정시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일말의 기대감으로 좌석에 앉았다. 승무원의 안내나 서비스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약 한 시간 정도를 날아 암스텔담 공항에 도착했다. 그 학생들이 탑승한 항공편 출발이 17시 30분인데, 내가 탄 비행기가 도착한 시각이 17시 28분이다. 2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항공기 문이 열리지 않는다. 17시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내려서 뛰었다. 그 학생들이 타고 출발할 그 항공기가 있는 곳으로 말이다.
해당 항공편 탑승구에 도착하자 다 탑승하고 항공기 문만 닫지 않은 상태다. 항공사 직원을 불러 여권을 학생에게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리 연락해 둔 터라 그 항공사 직원 얼른 알아듣고 여권을 들고 기내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 직원은 나오고, 문은 닫히고 항공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권을 무사히 전달한 것이다.
긴장했던 약 두 시간의 노력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땀도 뒤늦게 쏟아진다. 암스텔담공항에서 그 단체 승객들을 도와주었던 우리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너무 고마왔다.
나도 매인 몸이라 다시 본 소속인 파리로 돌아와야 했다. 다시 부리나케 돌아오는 편 항공기를 알아보고 수속을 마치고 항공기에 탑승하려고 보니, 왠지 낯 익다. 이런 ~~~ 아까 타고 온 그 비행기 다시 타고 파리로 돌아가야 할 판이다. ㅎ
항공기 탑승이 시작되고 승무원이 반갑게 인사를 하다가 내 얼굴을 보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당연하다. 좀 전에 도착할 때 내렸던 승객이 다시 항공기에 탑승하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You see me again? Yes!
불과 한 시간 만에 같은 비행기 다시 타야했던... 탑승권
다시 파리공항,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글을 빌어 서울에서 출발해 파리, 암스텔담, 코펜하겐 까지 힘들고 고단하게 여행한 단체와 그 인솔자 분에게 유감의 뜻을 전한다. 인솔자 분도 무척이나 화가 나고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었을텐데도 불구하고 대체안을 받아들였던 점 고맙고 감사하다. 그리고 어린 학생들에게도 비록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었겠지만,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 갔으리라 믿는다.
그날은 여권 때문에 똑 같은 비행기 두번 탔다.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