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개발한 비행체, 비행기, 항공기의 발달 역사
비행 형태의 변화[편집 | 원본 편집]
① 오니톱퍼(Ornithopter)[편집 | 원본 편집]
새의 날개, 비행 원리를 연구한 이탈리아 출신의 예술가이자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1485년 제시한 작품이다. 새와 같이 날개를 퍼덕여서 공중을 나는 원리였다.
하지만 인력의 힘만으로 작동하는 오니토퍼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비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1658년 이탈리아 생리학자이자 수학자인 보렐리(Giovanni Borelli)에 의해 결론 내려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5년 경에는 스크루 형태의 비행장치를 고안하기도 했다. 드릴이 회전하며 물체를 뚫는 모습을 보며 하늘을 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매우 기초적인 디자인만 남겨져 있지만 현대의 헬리콥터 개념을 찾을 수 있다.
② 열기구(Hot air balloon)[편집 | 원본 편집]
프랑스의 조제프 미셸 몽골피에(Montgolfier, 1740~1810), 자크 에티엔느 몽골피에(1745~1799) 형제는 공기가 뜨거워지면 위로 올라가며 물체를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열기구를 연구했다.
1783년 6월 4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왕 루이 16세 앞에서 열기구를 띄웠다. 동물을 태워 약 440미터 높이까지 날았다.
1783년 11월 21일, 몽골피에 형제와 물리학자 드로제, 아를란드 등 4명은 자신들이 만든 열기구에 탑승해 약 500미터 높이로 8킬로미터를 25분간 비행하는데 성공했다. '인류 최초의 유인 비행'이었다.
③ 비행선(Airship)[편집 | 원본 편집]
열기구에 프로펠러 등 동력장치가 추가된 비행체 형태다.
몽골피에의 1783년 열기구 유인비행 성공 이후 기구에 변화가 왔다. 유선형의 기구에 프로펠러 등 동력장치가 장착된 비행선의 출현이 그것이다. 1852년 9월 24일 프랑스의 앙리 지파드(Henri Giffard)에 의해 첫 비행선 비행이 시작됐다.
④ 로터크래프트(Rotorcraft)[편집 | 원본 편집]
1877년 Enrico Forlanini가 증기 엔진으로 구동되는 무인 로터플레인을 개발했다. 밀라노 한 공원에서의 실험에서 수직 이륙 후 약 20초 동안 13미터 높이로 상승했다.
유인 헬리콥터가 등장한 것은 1907년 Breguet-Richet 자이로 플레인(Gyroplane)이었다. 같은 해 프랑스의 폴 코르뉴(Cornu, 1881~1944)가 고도 1미터, 체공시간 20초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최초로 실용화한 회전익기는 비행기에 로터를 장착한 오토자이로였다. 전진 비행은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이용했으며 상부의 프로펠러는 단순히 부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23년 스페인의 후앙 드라 시에르바(1895~1936)가 로터 구조를 개량하고 이후 라울 파테라스 페스카라(1890~1966)가 로터의 피치 제어 기구를 발명했다. 1935년 프랑스의 루이 브레게(1880~1955)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동출 반전식 헬리콥터를 개발했다.
1936년 독일의 헨리히 포케(1890~1979)의 Fa-61은 첫 비행에서 28초 체공에 성공한 이후 개량을 거듭해 이듬해에는 체공시간 1시간 20분, 고도 약 2,400미터, 시속 약 122킬로미터라는 공식 기록을 만들어냈다.
현대적인 헬리콥터의 모형을 만든 것은 이고르 시콜스키였다. 1939년 비행에 성공한 VS-300은 헬리콥터 실용화 가능성을 보여줬고 이후 시콜스키가 1942년 개발한 R-4 헬리콥터는 세계 최초의 양산 헬리콥터가 됐다.
⑤ 글라이더[편집 | 원본 편집]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편집 | 원본 편집]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 1848~1896)은 조지 케일리의 양력이론을 바탕으로 비행실험을 통해 글라이더로 실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공기 역학을 응용해 글라이더를 개발해 1891년 비행에 성공했다. 그는 동력의 필요성을 깨닫고 엔진까지 개발을 진행했지만 비행 실험 도중 사망하면서 연구는 중단되었다.
라이트 형제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Octave Chanute[편집 | 원본 편집]
Chanute(1832~1910)는 Progress in Flying Machines라는 저서를 펴내며 글라이더 비행 원리를 집대성했고 릴리엔탈의 글라이더를 보완한 글라이더를 개발하기도 했다. 라이트 형제도 이 책을 통해 비행 연구에 큰 진전을 보게 된다.
⑥ 동력 비행[편집 | 원본 편집]
수많은 비행 원리 연구와 실험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며 1900년대 들어서면서 동력 비행의 시대를 열게 된다.
사무엘 랭글리[편집 | 원본 편집]
저명한 과학자였던 사무엘 랭글리(Samuel Langley), 발전된 이론과 체계로 비행기를 개발을 시도했지만 정작 비행에는 실패했다. (1903년 10월 7일, 12월 8일)
라이트 형제[편집 | 원본 편집]
1903년 12월 17일, 노스케롤라이나주 키티호크 근처의 킬 데빌 언덕에서 복엽기를 제작해 형제가 교대로 비행하며 사상 첫 조종 가능한 동력비행에 성공했다. 라이트 형제 동생 오빌이 먼저 이륙해 12초 동안 36미터를 날았고, 4번째 시도에서는 형 윌버가 59초 동안 260미터를 날았다.
산토스 뒤몽(Santos Dumont)[편집 | 원본 편집]
1906년 10월 23일, 파리에서 유럽 최초로 동력 비행을 성공시켰다.
루이 블레리오[편집 | 원본 편집]
프랑스 개발자 루이 블레리오는 1909년 7월 25일 자신이 제작한 블레리오 11호로 '사상 최초로 영국해협 횡단 비행에 성공했다. 항공기 설계 및 개발에 전념하며 에어버스, 에어프랑스의 시초가 된 주요 기업을 설립해 운영하며 유럽 항공업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고르 시콜스키[편집 | 원본 편집]
헬리콥터 개발의 선구자로 현대 헬리콥터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VS-300(1939년) 기종을 개발했으며 1942년 세계 최초의 양산형 헬리콥터인 R-4를 개발했다.
비행 원리 연구[편집 | 원본 편집]
비행 원리의 연구는 이전까지 단순히 하늘을 뜨는데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었다면 이 비행 원리 연구를 통해 공중을 나는(Flying) 비행체의 출현을 앞당기게 했다.
조지 케일리(George Cayley)[편집 | 원본 편집]
1799년, 영국의 공학자 조지 케일리(Baronet, Sir George Cayley, 1773~1857)는 최초의 모형 글라이더 구조를 디자인하고 1804년에 최초로 모형 글라이더를 날렸다.
1809~1810년에 작성된 공중 비행에 대한 논문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날개치기 방식이 아닌 기계적 방식에 의한 비행 가능성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오늘날의 비행 이론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양력과 항력의 원리를 설명했다.
1749년 삼겹 글라이더를 만들었으며 그의 모형 글라이더는 오늘날의 비행기 형태로 근대적 비행 이론에 영향을 주었다. '항공공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니콜라스 오토(Nicholas Otto)[편집 | 원본 편집]
비행 원리보다는 비행을 위한 동력 개발에 주력했다. 1896년에 제시한 내연기관의 4행정 이론은 오늘날의 피스톤 엔진의 작동 원리가 되었다.
전쟁의 도구[편집 | 원본 편집]
비행기가 발명되고 나서 비행의 개념을 전쟁의 도구로 확장시키게 되었다. 우선 가장 먼저 활용한 부분은 정찰이었다. 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 독일군 양측의 정찰기 사용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찰용에서 공격용 비행기를 구상하게 되었다. 처음 전투기 등장은 상대방 정찰기를 막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다 점점 역할이 커지며 지상 공격, 공중전 등으로 확장하게 되었다.
1차 대전 중 가장 큰 활약은 포커에서 개발한 Fokker 전투기였다. 독일군이 사용한 이 전투기는 프로펠러와 기관총의 위치 문제를 시간 단속 기어를 사용해 해결한 당시 최고 성능의 전투기였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폭격기가 개발되었고 연합군 측의 Handley Page나 Vickers Vimy 등에서 만들어진 폭격기들이 큰 활약을 펼쳤다.
비행기 기술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제트 비행기 시대[편집 | 원본 편집]
1939년 8월 27일, 독일의 한스 폰 오하인의 가스터빈 엔진을 바탕으로 하인켈 He 178 제트기가 탄생했다. 이후 실제 활용 가능한 제트 비행기 Me 262가 출현하면서부터다. 1942년 7월 18일 첫 비행에 성공하면서 전투기로 개발되어 독일군에 1944년 4월 정식으로 배치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실제 활용도는 미미했다.
민간 대량 수송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전쟁 중 비약적으로 발전한 비행기 제작 기술은 자연히 민간으로 그 활용처를 찾기 시작했고 전투가 아닌 수송의 수단으로 활로를 찾았다.
미국의 보잉은 1933년 2월 8일, 최초로 완전 금속제 쌍발 여객기 Boeing 247(10인승)을 개발했다. 인입식(접이식) 랜딩기어(Retractable Landing Gear)로 공기저항을 감소시키고 한 개 엔진만으로도 상승 가능한 성능을 가졌다. 순항속도는 시속 250킬로미터에 달했고 이 항공기 출현 이후 민간 항공기 제작산업은 급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전쟁 막바지에 개발된 터보제트 기술을 이용해 사상 처음으로 터보제트 엔진을 민간 여객기에 장착했다. 이것이 de Havilland Comet이었다. 영국에서 개발한 이 여객기는 대형 장거리 항공기 개발이라는 목적을 달성시켜 주었다. 1949년 7월 27일 첫 비행에 성공하고 1952년부터 BOAC를 통해 상용비행에 들어갔다.
보잉은 1958년 10월에 팬암항공을 통해 대서양 횡단 노선에서 B707 제트 여객기를 통해 대량 수송 시대를 열었다. de Havilland Comet이 40명 가량 탑승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B707은 약 200명을 태울 수 있었다. 그리고 1970년 등장한 B747 기종을 시작으로 DC-10, L-1011, A300, Il-86 등 큰 동체를 가진 대형 제트 여객기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한편 1976년 영국항공, 에어프랑스 등을 통해 등장한 콩코드 항공기는 초음속 여객기라는 또 다른 시대를 열었으나 비용 대비 효율성 및 소음 등 환경 문제로 조기 퇴역했다.
1970년대 대형 항공기 시대를 연 B747 기종과 2000년대 A380 초대형 항공기는 최대 500~800명 가량의 대량 수송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면서 허브 앤 스포크 네트워크 형태의 대량 수송의 장점이 점차 감소하고 저비용항공시장 확대로 포인트 투 포인트 네트워크가 활발해져 효율성 높은 중대형기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었다. B747, A380 기종이 동시에 시장에서 역할이 감소되었는데 그나마 B747은 40년 가량 하늘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장거리·대량수송 역할을 담당한 반면 A380 기종은 불과 10여 년 만에 시장에서 퇴출되는 신세가 됐다.
참고[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