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행기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남았죠?"
"죄송합니다. 고객님의 질문에 답변 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비행기 여행을 하다보면 답답한 게 한두가지 아니다.
버스처럼 창문을 열어 바깥 공기를 맡을 수도 없고, 외부에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 지 조그만 창문을 통해서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제한적인 것도 그 중의 하나다.
외부 환경을 제대로 알 수 없으니 이 비행기가 제대로 날고 있는 지 제대로 실감하기 어렵다. 귓가로 스쳐가는 바람을 느낄 수도 없고, 도로변 가로수도 없으니 그 속도를 체감하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보통 제트 항공기의 속도가 무려 800 킬로미터 내외라는 건 감히 생각하기 힘들다.
항공기 안에서 이런 속도를 체감할 수 있는 방법은 눈 앞에 있는 모니터가 유일하다.
보통 이런 모니터를 IFE (In-Flight Entertainment), 기내 엔터테인먼트 장비라 부른다. 예전에는 기내에서 영화 한편 보려면 마치 극장처럼 항공기에서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영상을 그저 쳐다볼 수 밖에 없었지만 최근에는 승객이 자신 앞에 있는 이 IFE 장비를 통해 수십개의 영화나 음악을 마음껏 선택해 즐길 수 있다. 장거리 비행에서 이 IFE의 중요성은 더욱 커, 이를 아는 승객들은 일부러 이런 장비가 설치되어 있는 항공기인지 확인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IFE 장비가 주로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게 주 목적이지만, 그 밖에 이 장비를 통해 현재 내가 날고 있는 위치나 비행기의 속도 등 비행과 관련된 정보를 알 수도 있다.
이렇게 보여주는 항공기 비행정보를 일명 기내 에어쇼 (In-Flight Airshow) 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비행기 전시 행사인 에어쇼와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항공사들은 이 기내 에어쇼를 통해 승객들에게 가능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궁금해 하는 내용을 미리 보여주면 그만큼 질문이 줄어들어 대신 승객들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할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기내 에어쇼 (Airshow)
그런데 앞으로 당분간은 비행기 안에서 이런 기내 에어쇼를 보기 힘들 전망이다.
며칠 전, 성탄절 새벽에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네덜란드 암스텔담을 출발해 미국 디트로이트로 향하던 노스웨스트 항공기 안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마지막 시점에 실패로 끝나 항공기와 승객, 승무원 모두 무사했지만, 지난 911 테러를 겪었던 미국인들에게는 공포와 충격 그 자체인 소식이었던 것이다.
디트로이트 도착 시각에 즈음해 한 나이지리아 청년은 액체와 분말을 섞어 폭발물을 만들고 자신의 좌석에서 점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폭발물 처리 방법이 미숙했던지, 주변 승객과 승무원의 현명한 대처로 이 테러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더욱 놀라운 소식은 이 나이지리아 청년이 알카에다 조직원이라는 것과 그 자백을 통해 밝혀진 것은 앞으로 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본격적인 테러를 위해 적지않은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비행기 테러 공포증을 겪고있는 미국은 지금까지 보다 더욱 강력한 보안 대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장 사건이 발생한 날, 미국 TSA 는 미국으로 향하는 모든 항공편 승객들을 대상으로 지금보다 몇 배 강한 보안 검사를 포함한 여러가지 대책을 전 세계 항공사들에게 전달했다.
비행기 탑승 전 다시한번 보안 검색을 받아야 하며, 의심스러운 경우 개별 촉수 검사까지 이루어질 수도 있다.
또한 항공기가 비행하는 동안에는 항공기 비행과 관련된 일체의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보통 항공기가 이륙하면 기장은 '이 비행편은 어디까지 날아가고, 시간은 얼마나 걸리며, 도착 시각은 언제'라는 안내 방송을 한다. 그리고 도착 즈음해서는 도착 준비를 위해 그 내용도 미리 알린다.
그런데 이런 정보를 일체 승객에게 제공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번 노스웨스트 항공 폭탄 테러와 관련해 범인인 나이지리아 청년이 디트로이트 도착 즈음에 화장실에서 폭발물을 제조했고, 폭파를 시도했다. 이런 테러는 미국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비행하는 도중에 테러를 벌이는 것 보다, 미국 영토에 들어왔을 때, 많은 시설과 인명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폭발물 테러가 있었던 노스웨스트항공
지금 항공기 속도가 얼마이며 날고 있는 위치는 어디고, 앞으로 얼마 후에 목적지 공항에 도착하게 될 지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므로써 테러 시도를 최소화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전화나 인터넷 등 통신은 금지되고, 도착 한 시간 전부터는 좌석 이동이나 이석을 제한하고, 선반 등에 넣어둔 휴대품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다고 한다. 거기다 도착 즈음해서는 무릎에 담요 등을 덮는 행위도 금지된다. 이번 범인이 마지막 폭발물 점화 시도를 담요를 덮어 그 안에서 시도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액체류 기내 반입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심지어 여성 화장품도 휴대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소문도 들릴 정도니 두말하면 피곤할 정도다.
하지만 이런 대책이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조금은 의문이다. 항공편 비행시간은 이미 알려져 있는 정보이니만큼 기내에서 에어쇼나 방송을 금지한다고 해서 테러리스트가 불편(?)해할 것 같지는 않다.
어쨌거나 앞으로 기내에서 벌어지는 에어쇼를 볼 수 없다고 하니 조금 아쉽다. 그리고 앞으로 비행 중에 승무원으로부터 여러가지 잔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좌석을 떠나지 마세요, 무릎에 덮으신 담요는 수거하겠습니다 등등 말이다. 그리고 언제 도착할 지 물어봐도 '죄송합니다' 라는 답변만 듣기 쉬울 것이니 조금은 답답하더라도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자 필요 없어져 좋아했더니... 미국 가기 한번 힘들다. ㅎㅎ
추가 사항 (2009.12.30 현재)
몇가지 변경 내용이 있어 추가 합니다. (미 TSA 보안 강화 변경내용)
우선 항공기 도착 1시간 전부터 이석 금지와 휴대품 접근 금지 항목이 삭제되었습니다. 그리고 전화 등을 이용한 통신 금지 내용도 취소되었군요.
현재 비행 중 보안 강화된 내용은 비행 중 승무원 요청이 있을 경우 지정 좌석에 착석해야 하는 것과 미국 영공을 통과하는 시점부터 비행 경로나 주요 Landmark 안내 방송 금지 항목입니다.
따라서 비행을 시작해 미국 영공 진입 전까지는 기내 에어쇼 방영은 가능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물리적 보안에는 한계가 있을텐데..
조금은 더 현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이스라엘은 프로파일링 기법까지 동원한다 하더라구요..